성적 지향과 왜곡된 당사자성

_ 오늘은 다른 사람의 성적 지향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이 글은 트위터의 여러 유저들이 보인 게이다(* 비언어적 요소를 통해 타인의 성적 지향, 특히 동성애를 추정하는 능력을 말한다)에 대한 반발 및 후각모형을 사용한 무성애의 정의의 구체화 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성적 지향의 증명의 필요성에 대한 반발을 계기로 작성되었다.

1. 성적 지향

어떤 사람의 성적 지향과 관련된 정보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A. 그 사람의 실제 성적 지향
B. 그 사람이 갖는 스스로의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인식
C. 그 사람이 자신은 이렇다고 선언하는 성적 지향

_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란 생물학적 특성으로서, 성별에 대한 이끌림의 패턴을 말한다.

_ 자신의 성적 지향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동시에, 성적 지향은 오랜 기간에 걸쳐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이는 곧 성적 지향이 하나의 특질(trait)임을 뜻한다. 특질이란 심리학 용어의 하나로서, 오랜 기간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예측 가능한 개인의 속성을 말한다. 쉬운 예시로 성격을 들 수 있다. 사람의 성격 또한 시간에 걸쳐 다소 유동적이기도 하며, 또한 후천적 요소의 영향을 다소 받기도 한다. 성적 지향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다.

_ 성적 지향의 유동적/후천적 요소가 곧 성적 지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격을 생각하면 쉽다.

_ 성적 지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 곧 성적 지향을 존중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역시 성격을 생각하면 쉽다.

_ 어떤 사람의 성적 지향과 연관된 정보로 그 사람의 성적 지향 정체성(sexual identity)을 들 수 있다. 이 용어는 주로 [성적 정체성]으로 번역되나, 여기서는 [sexual identity]가 성별이 아닌 성적 지향에 대한 단어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성적 지향 정체성으로 표기한다. 성적 지향 정체성은 스스로의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인식을 말한다. 자신의 성격에 대한 자기인식을 생각해 보자.

_ 어떤 사람이 자신은 이렇다고 선언하는 성적 지향 또한 그 사람의 성적 지향과 연관된 정보이다. 어떤 사람의 실제 성격과 그가 자신은 이렇다고 선언하는 성격이 반드시 동일하리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처럼, 어떤 사람이 자신은 이렇다고 선언하는 성적 지향과 그의 실제 성적 지향이 반드시 동일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둘은 일치할 수도, 비슷할 수도, 조금 다를 수도, 많이 다를 수도 있다. 예시로는 디나이얼 게이의 경우나, 스스로를 게이라고 표현하는 바이섹슈얼, 내지는 설명이 귀찮아서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표현하는 무성애자의 경우, 아직 [무성애]라는 단어를 접한 적이 없어서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표현하는 경우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추정, 금기, 당사자성

_ 이처럼 성적 지향을 성격에 빗대어 이해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편리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적 지향의 판단 및 추정]을 대하는 방식은 [성격의 판단 및 추정]을 대하는 방식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아 보인다. 어떤 이들은 성적 지향의 추측은 나쁜 일이며 폭력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_ 그런데, 자신의 성적 지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그것이 RPG 캐릭터의 스탯과 비슷한 형태로 존재하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타인에 의한 추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성적 지향의 추측을 금기시하는 이들은 그것의 가능함과 폭력성 여부는 별개라고 할 터이나, 이들은 종종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검은색 반지(* 착용자가 무성애자임을 나타내는 심볼 중의 하나이다)나 보라색-회색의 무성애자 플래그 패턴의 각종 스티커 및 뱃지들을 누군가가 보고서 자신이 무성애자이리라 알아봐줄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욕망에는 모순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밝히지 않은 무성애자를 무성애자라고 추정하는 것은 폭력이다”라는 주장이 참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떤 사람이 오른손 중지에 착용하고 있는 검은색 반지를 보더라도 그를 무성애자라고 알아보는 금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무성애자가 아닐 수도 있으니 말이다!

_ 이와 관련해, 어떤 사람들은 “무성애자라는 단어는 누구든지 차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라는 표현을 인용해 그들의 입장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하곤 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무성애라는 개념이 처음 알려질 당시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무성애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자아탐색을 촉진함으로서 경험의 사회적 공유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략적으로 사용되었던 구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어떤 사람들은 이 표현을 인용하며 마치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선언하는 모든 이들을 어떤 형태로든 부정하지 않는 것이 최우선 가치인 양 행동한다. 이들은 “무성애자라는 단어는 누구든지 차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라는 표현을 오용해,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선언하는 유성애자]를 무성애자로 볼 수 없다고 배제하는 것 또한 언제나 나쁜 일이자 폭력임을 암시한다. 물론 자아탐색을 장려한다는 원래의 목적에 해가 되는 방식의 부정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모든 종류의 추정은 언제나 폭력”이라는 식의 극단적 주장에는, 간과되고 있는 점이 있다.

3. 어떤 취약점

_ 서구 사회에서와 비교해 한국 사회에서 무성애자로 정체화함이 갖는 특징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무성애자로 정체화함은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입지를 획득함과 동시에 각종 성범죄 혐의들로부터 안전한 존재로서의 입지를 획득한다는 이중적인 효과를 가진다는 점이다. 문제점은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입지의 획득이 어떤 사람의 실제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단지 선언만으로써 유효히 동작하고 있다는 데 있다.

_ 이는 어떤 치명적인 취약점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어떤 유성애자인 악인이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주장함으로서 취약한 이들의 신뢰를 얻고 무성애자라는 타이틀을 그루밍 범죄에 활용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타인의 성적 지향에 대한 모든 종류의 추정을 금기처럼 여기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 점을 대체 누가 보장해줄 것인가?

_ 만약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도 그것은 가해자의 죄이니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무성애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성범죄 혐의가 제기된 상황에서 그 혐의의 적법한 처리 내지는 자유로운 공론화가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라. 무성애자에 대한 사회적인 낙인을 우려해 목소리가 묵살될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_ 만약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도, 엄밀하게는 무성애자 중에도 악인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어떤 사람이 무성애자라고 해서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생각한다면,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린 것에 대해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_ 이렇게 무성애자라는 타이틀이 어떤 사람에 대한 신뢰감과 연결지어져 있는 상황에서, 만약 타인의 성적 지향에 대한 추정을 허용한다면 그 연결고리로 이어진 신뢰감 또한 추정의 대상으로 포섭하는 셈이 된다. 이는 만약 위와 같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접하는 무성애자들이 사건을 악화시키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_ 그러나 이 유형의 사건은 이미 여러 차례 발생했고 한국의 많은 무성애자들은 타인의 성적 지향을 추정해서는 안된다는 얄궂은 금기를 지키고자 반복적으로 사건들을 악화시켰다.

4. 마치며

_ 어떤 사람들은 타인의 성적 지향에 대한 추정을 금기시 여긴다. 이는 득보다 실이 크다.

  1. 성격처럼, 어떤 사람이 자신은 이렇다고 선언하는 성적 지향은 그의 실제 성적 지향과 다를 수 있다. 성적 지향의 추정은 근본적으로 가능하다.
  2. 성적 지향의 추정을 금기시하는 태도에는 모순점이 있다. 이 태도를 가진 이들은 남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알아봐주기를 원하곤 한다.
  3. “무성애자라는 단어는 누구든지 차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라는 표현의 원래 목적은 자아탐색 장려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를 잘못 해석해 마치 스스로를 무성애자라고 선언하는 모든 이들을 어떤 형태로든 부정하지 않는 것이 최우선 가치인 양 행동한다. 이는 무성애자라는 타이틀을 악용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 피해자들을 사각지대에 처하게 한다.
  4. 그러므로 타인의 성적 지향에 대한 추정은 더 이상 금기시되지 않아야 한다.